<산 시 모음> 정연복의 산을 오른다는 것 외
+ 산을 오른다는 것
산은 오르고 올라도
오르는 게 아니다
가늠할 수 없이
드넓은 산의 품
그 산을 어찌
정복할 수 있단 말인가.
산의 최고봉에
발을 디뎠다 한들
그렇다고 해서
그 산을 정복한 것은 아니다
산은 한갓 높이로
헤아리는 게 아니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이들은
산 앞에 몸을 바싹 낮춘다
거대한 높이 앞에서
겸허함이 끝없이 깊어진다
오르면 오를수록
더 넓고 깊은 산의 품안에서
한 점 티끌일 뿐인
자신의 작은 존재를 깨닫는다.
인생의 진리도 이와 같으리.
+ 산을 노래함
창동역 근처
우리집 뒷베란다 창문 너머
도봉산이 환히 보이는데
.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 아래
오늘은 그 모습 더욱 선명하다.
언제였을까
자신이 태어난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하늘이 허락한 만큼의
공간에 머물러
사시사철 한결같은 산
더 높아지려는 욕심 없이
더 커 보이려는 허세도 없이
늘 그 자리 그 모습.
그래서 세월 흘러도
늙지 않고 추해지지 않고
영원한 청춘의 산
+ 산
땅에 뿌리박고서도
하늘을 우러러 있는 산
저만치 바라만 보아도
그냥 마음이 평온해진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마음은 그만큼 더 낮아지고
산을 내려오면서도
영혼은 더욱 깊어진다.
오르막이나 내리막
세상의 모든 산길은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참 아름답고 신기한 길.
사시사철
기쁠 때나 슬플 때에도
좋은 벗들과 함께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살아서 누리는
큰 축복 아닌가.
+ 산(山)
산과 벗한 지
어느새 여섯 해째 되었다
만 오십 년을 살도록
까마득히 몰랐던
그 산이 어느 날
운명처럼 내게 다가와
이제 틈만 나면
나도 모르게 산을 찾는다.
언제라도 넉넉히
나의 존재를 품어주는
엄마 품같이
편안한 산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뿐
말없는 산의
고요한 품속에서
문득 나는
아가 같아진다
세상 근심 걱정
하나 없는
철모르는
아가 된다.
+ 하느님 산(山)
산은 세상에 뽐낼 만한
큰 덩치를 갖고서도
하늘 아래
제 몸 바싹 낮추네
산은 갖가지 생명
온몸으로 품어 안고서도
조금도 티를 내지 않네
잘난 체하지 않네
산은 천년 만년
오래오래 살면서도
영영 늙지를 않네
한결같이 한 모습이네.
산은 한없이
겸손한 자세이면서도
마치 하느님 같이
거룩한 얼굴을 하고 있네.
그래서 산의 품속에 들면
우리도 산을 닮아 가네
세상살이 근심 걱정 잊고
마음이 참 편안해지네
욕심도 미움도 사라지고
생각이 맑고 넓어지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우리 영혼이 차츰차츰 깊어지네.
고마운 산
하느님 산!
+ 초록의 산
살아가는 일이 따분하고
마음 답답한 날
세상살이 시름에 겨워
한숨 나오는 날
삶의 의욕이 시들해지고
피로가 몰려오는 날
정신이 어지럽고
머리 복잡한 날에는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초록의 산으로 가자
산마루에 올라
초록 물결을 바라보자
저 싱그러운 초록빛 기운
가슴 가득 담아보자
초록의 희망
초록의 생명으로 물들어보자
+ 오봉(五峯)
벗과 둘이서
오르는 도봉산 초입
아기 솜털 같은 눈
하나 둘 날리더니
어느새 함박눈 펄펄 내려
온 산이
순백의 별천지 되었네.
낯익은 길을 덮어
그냥 온 사방이 길이어도 좋을
멈춤 없는 폭설 속
앞서간 이들의
희미한 발자국 따라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바로 눈앞에
홀연히 꿈같이 펼쳐진 오봉.
그래, 인생길도
이렇게 걸으면 되리
더러 흐릿해지는 길
비바람 불고 눈보라치는 길도
겁내지 말고 뚜벅뚜벅 걷노라면
사랑 믿음 소망 진실 우정의
다섯 봉우리에 닿을 수 있으리.
+ 북한산 둘레길
아직은 2월 말
꽃샘추위 심술 부릴 만도 한데
오늘 따라 봄기운 완연하다
딸과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꽃 피우며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그 동안 쌓인 얘기 많았는지
딸은 종달새같이
쉴새없이 재잘거렸다.
멀리 포항에서 대학을 다녀
가끔 무척 보고 싶었던 딸이랑
함께 걸은 한 시간 남짓의 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딸이 떠나고 나면 문득 생각날
내 맘속 한 점 행복한 추억
긴 겨울 너머
봄의 발자국 소리 들리는 듯
조용히 밝고 따뜻한 길.
+ 문득, 깨달음
꽤 오랜만에
벗들과 아차산 야간 산행을 했다
산행이라고 해야
한 시간 남짓 쉼 없이 걷는 정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한동안 총총걸음을 하다
긴 고랑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이십 여분 가량의 고생길.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고
호흡이 퍽 가빠왔지만
야트막한 능선에 닿은 후
평지같이 편안한 길이 쭉 이어졌다.
등산에 입문한 지 일곱 해 째
매번 산행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숨가쁜 오르막길은 지옥이요
상쾌한 내리막길은 천국 같은데,
한 생각이 휙,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오르막 없는 내리막 없고
내리막 없는 오르막이란 없어
오르막과 내리막은
산의 같은 품속 한 짝이라는 것.
산길이 그러하듯
모든 인생의 길도 그러하리라는 것
어쩌면 삶의 천국과 지옥도
한 동전의 양면일지 모른다는 것.
잠시의 산행 중
오늘밤 문득, 깨달았다.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