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에 대한 오해와 진실… 명량대첩 때 거북선·쇠사슬 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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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우리에게 성웅(聖雄)이란 말로 친숙해져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후대에 더욱 영웅화된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 왜군과 40여 해전을 치르면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특히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水軍)의 배 13척으로 북상하는 왜선 133척을 물리친 전공은 해전 사상 최고의 전투로 손꼽힌다. 최근 영화 명량에 관객이 몰리는 것은, 이순신의 신화적인 전과(戰果)와 인간미를 사실과 근접하게 다루면서 극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순신이 상황에 맞게 부하를 지휘한 리더십은 승전의 주요 원인이다. 여기에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 점도 매우 중요했다. 그 당시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 명량의 협수로를 선택한 결과,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개별 대응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중국 병법의 원조(元祖) 격인 오자(吳子)가 열로 백을 치는 데는 험한 곳이 제일 좋다(以十擊百 莫善於險)고 한 이론과 일치한 작전이었다. 숙종 때 대제학 이민서는 명량대첩비에서 명량 전투가 가장 신기하고, 전투에서 완승했다고 평가했다.
후대에는 명량대첩에 대해 이설(異說)도 생기게 되었다. 특히 거북선과 쇠사슬(鐵鎖)의 사용 여부 문제에 대한 것이다. 이순신 조카 이분(李芬)이 쓴 충무공행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거북선 모양으로 전선을 장식하여 군세를 돕게 한 내용이 있으므로, 실제 거북선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쇠사슬인데 18세기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는 이순신이 명량의 돌다리에 쇠사슬을 걸어 왜선을 전복시켰다고 하였다. 시바야마 나오노리(柴山尙則)의 조선 이순신전에도 쇠사슬 이야기가 나온다. 19세기 유학자 심대윤(沈大允)의 이순신전에도 이순신이 쇠사슬을 다리 아래 매어 놓아 적선들이 접근하면 바로 걸려서 전복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선조실록이나 그 당시 기록에는 없는 것으로,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이순신에 대한 오해 중 가장 큰 문제는 자살설이다. 선조의 불신과 당쟁의 갈등으로 인해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 설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으로 이민서가 지은 김충장공유사에 이순신은 한창 싸울 때 투구를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方戰免胄 自中丸以死)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면주(免胄·투구를 벗다)는 장수가 결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표현하는 관용적인 말이므로, 자살의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그가 후에 지은 명량대첩비에 이순신을 순국(殉國)한 것으로 기록한 점을 보면, 앞의 기록은 격전한 끝에 탄환을 맞은 것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은둔하다가 16년 뒤에 사망했다는 은둔설도 있다. 이는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이다. 이순신의 장례를 치른 후 맏아들 이회(李�)가 조문객 현건에게 답례로 보낸 편지가 이를 반박할 근거가 되어 준다. 위인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사실과 다르게 왜곡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이순신의 정신과 업적을 길이 전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적인 사실부터 올바르게 규명해야 한다.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