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6,25 전쟁이 올해로 63주년이 되었다.
요즘 6,25 남침을 많은 고교생이 북침이라고 알고있는가 하면 남침 북침의 용어조차도 몰라 드디어 국방부가 북한의 남침.이라고 공식용어를 변경했다고 한다.
그동안 왜곡된 역사교육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국어교육도 문제가 있었나 싶을정도의 우리나라 교육현장을 보면서 6,25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겪은 우리로서는 이러한 현실이 통탄 스러울 뿐이다.
지금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전쟁의 아픔이지만 6,25 전쟁 당시 초등하교 일학년으로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온가족이 허급 지급 고난의 피난길에 올랐다.
우리집은 낙동강이 빤히 보이는 산골마을로 평소 친구들과 강에서 멱을 하면서 놀던 그 강을 농사일로 키우던 누렁이에 피난 봇다리를 바리바리 싣고 다리도 없던 시절 물살이 센 낙동강을 도강을 하는데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걱정해서 소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여 소의 꼬리를 있는힘을 다 해 꽉잡고 겨우 강을 건너와서 보니 약 200m는 떠 내려와 있었다. 나는 그때 소가 그 육중한 몸으로 헤엄을 치는것(그것도 등에 짐을 잔뜩싣고)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하여 시작된 고달픈 피난길이 시작되어 몇밤을 지새며 다부동 고개(당시 대구를 사수하기위해 다부동 전투는 아주 치열하였음)를 넘어 대구에 당도했다.
대구에는 고모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대구도 인민군의 총공세에 함락 될거라는 소문이 파다하여 안전치 못하다고하며 아버지는 우리가족을 데리고 밀양까지 내려갔다.
그때부터 밀양 어느 야산 산비탈에 비만 겨우 가릴 정도의 피난 천막생활이 시작되었다. 여러날을 오다보니 양식이 바닥이 나서 개비름(줄기가 굴고 빨간색)까지 듣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배고품과의 싸움이 계속 될쯤 납짝 보리쌀(양을 널리기 위해 보리쌀을 납짝하게 눌렀음) 배급이 시작되어 배고품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 고생을 반복하기를 몇달째 인민군이 물러 갔다는 소식에 왔던길을 거슬러 돌아 오는데 어린 눈에 비친 전쟁의 상처는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다부동을 넘어 오는데 길 양편으로 미처 치우지 못한(치울 인력도 없었겠지만) 국군과 인민군의 시신이 즐비하고 소나 말 등 동물들의 사체도 섞여 있어 악취가 진동하고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하여 다시 돌아온 집은 그야 말로 쑥대 밭이 되어 있었다. 인민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지 방이며 문짝이며 성한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피난갈때 아버지께서 안전하다고 믿고 묻어둔(소를 매어 두는곳. 사투리로 거름티라고함) 장독까지 그들이 그곳에 말을 매어 놓아 다 깨어져 있었다.
다부동 전투도 치열했지만 내가 살던 고향도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로 백사장에 시신들이 나 딩굴고 있었다. 나는 배고품과 어린나이에 위험한것도(실제로 한 친구는 박격포탄 뇌관을 두드리다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친구도있다) 모르고 동네친구들과 낙동강 백사장에 가서 하루종일 돈이 될만한 물건이면 뭐든지 집으로 가져 왔다. 그물건 중에는 권총, 따발총, 그당시엔 귀한 시계, 포탄 파편등 쇠붙이는 죄다 가져와 부모님 몰래 감추어 놓았다. 그런데 얼마있지 않아 지서에서 모든 물품을 내놓지 않으면 잡아간다는 소식에 그 아까운(?) 물건들을 다 내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나는 쓴 웃음만 나온다.
6,25 전쟁 63년주년이 되는 현재까지도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을 개발하여 남한을 위협하고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노 전 대통령의 NLL의 대화록에 6,25 전쟁을 몸소겪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믿기 힘든 발언을 하여 온나라가 시끄럽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6,25가 왜 일어 났는지 조차도 모르는 역사교육을 받고 있어 앞날이 걱정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자신들이 무었을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사회 대통합을 이루워 경제를 살리는 길만이 호국영령들이 피흘려 지켜온 이나라를 한단계 도약 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6,25 전쟁 63주년을 보내며 며칠전 전쟁에 몸바쳐온 노병이 한 말이 생각난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